나눔-사순4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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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9회 작성일 25-03-30 14:09본문
오늘 복음에서는 화해의 중요성과 필요성에 대해 예시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인간은 누구나 실수나 잘못을 저지릅니다. 열정과 의욕을 다해 최선의 결과를 얻기 위하여 발생할 수도 있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행위들은 더 나은 방법으로 승화될 수도 있고, 의식하지 못한 채 동일한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인식성찰의 여부에서 드러납니다.
과거 이집트를 탈출하여 하느님께서 예비하신 가나안 땅으로의 여정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400여년 가까이 광야에서의 생활에 안주하여 고착화된 마음들이 너무 굳어버린 탓에 만족하지 못하고 불평을 터트립니다. 자비와 사랑으로 대해주셨음에도 동일한 잘못을 저지른 결과, 세대가 바뀐 여호수아에 이르러 용서를 받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사건을 통해 단순히 하느님은 두려움과 분노의 이미지로 여겨진다면 그 안에 숨겨진 진실을 간과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위해 어루달래고 화해의 기회를 주셨음에도 이들은 이것을 거부했기 때문에 마땅한 벌을 받은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비단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랑과 사람이 서로 맞대고 살아가는 모든 공동체의 구성원 속에서 흔히 일어나는 것이 현실입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행동양식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의 사건들이 언제나 옳은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약점을 드러내기 싫어서 강한 어조와 행동으로 상처를 주거나, 지금까지 이룩해 놓은 것들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내로남불식의 언행불일치와 권력에 집착하는 이중적인 삶을 당연시 여기고 살아갑니다.
사람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동물입니다.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다른 이들을 희생시킨다면 우리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여 용서를 청한 작은 아들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인 아버지는 과연 하느님과 동일시 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일그러졌던 시간이 언제 있었냐는 식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화해의 체스처를 먼저 취했기 때문이며, 관계의 회복을 위한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지위나 부의 추적은 죽음 이후에는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는 인간의 허무한 욕심입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서로를 먼저 배려하고 실수나 잘못을 보듬을 수 있도록 자신을 변화시키는 노력이라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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