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염시태 無染始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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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8,044회 작성일 20-02-21 23:42본문
원죄, 마리아는 예외
세종대왕님이 알면 못마땅해 하실까. 교회는 전례를 집행할 때, 혹은 교리를 가르칠 때 종종 어려운 한자 漢字를 사용한다. 노아의 방주 方舟, 네모난 모양의 배가 그 예다. 그냥 ‘사각형 배’하고 하면 될 것을 성경은 굳이 ‘방주’라는 한자를 채택, 그 구원사적 의미를 돋보이게 했다.
지금은 달라졌지만, 성모님 교리와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과거에는 성모 승천을 몽소승천 蒙召昇天 이라고 했다. 부르심 받은 승천이란 의미다. 또 가브리엘 대천사가 마리아에게 찾아와 주님 탄생을 예고한 사건을 두고는 성모영보 聖母領報 혹은 수태고지 受胎告知라고 했다. 몽소승천과 성모영보에 대해서는 뒤에서 살펴보기로 하고….
여기서 주목하려는 한자는 성모 무염시태 無染始胎다. 없을 무 無, 물들일 염 染, 처음 시 始, 아이 밸 태 胎, 즉 성모님은 처음 잉태되는 그 순간부터 원죄로 물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안나와 요아킴이 늘그막에 아기를 가진다. 달이 차서 안나가 어렵게 출산했는데, 여자 아이였다. 그런데 이 아기는 좀 특별하다. 원죄가 없다! 이것이 무염시태 교리,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교리의 요지다. 라틴어로는 줄여서 임마쿨라타 콘쳅시오 Immaculata conceptio, 원죄없는 잉태 혹은 임마쿨라타Immaculata, 원죄없는 이라고 한다. 이 교리는 1854년 12월 8일 교황 비오 9세재위 1846~1878의 회칙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Ineffabilis Deus을 통해 선포됐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교리에 의하면 ‘원조 인간’ 때문에 우리 모두가 ‘원죄 인간’이 됐다. 그런데 왜 유독 마리아만 원죄에 물들지 않았을까.
의문은 또 있다. 교회는 왜 2000년 가까이 가만히 있다가 1800년대 중반에 들어서야 이 교리를 믿을 교리로 선포했을까.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긴가민가 했다는 말인가. 왜 애초부터 자신 있게 “성모님은 원죄 없이 잉태되셨다”고 하지 못했을까. 실제로 교회는 ‘원죄 없는 잉태’ 교의와 관련해 오랜 기간 고민을 해 왔다. 그 내용이 복음서에 명확하게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중은 이미 성모님이 원죄 없이 잉태되었다는 진리를 피부로, 영적으로 체험하고 있었다. 17세기에 이르기까지 이를 믿을 교리로 선포해 달라는 신자들의 요청이 빗발쳤다. 그럼에도 교도권은 중립적 자세를 취했다. 교황 식스토 4세Sixtus Ⅳ, 1471~1484 재위는 회칙을 반포해 더 이상 원죄없는 잉태에 관해 논쟁하지 말라고 까지 했다. 교황 그레고리오 15세Gregorius XV, 1621~1623 재위도 “끊임없이 기도했으나 성령은 이 신비의 비밀을 아직 열어 보이지 않고 있다”고 했다.
이처럼 교회가 오랫동안 중립적 태도를 견지한 것은, 구원 문제에 대한 이해 때문이었다. 죄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는 구원은 원칙적으로 그리스도에 의해 이뤄지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기도 전에 이뤄지는 마리아의 원죄 없는 탄생은 십자가 없는 구원이라는 난해한 신학적 논증을 불러왔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구원은 죄로부터의 해방에만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하느님 구원약속은 신적 생명의 충만함에 있다는 점이 새롭게 논증되어야 했다.
교회의 또 다른 고민은 원죄 개념 자체에 대한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죄는 하느님의 인격적 사랑에 대한 개별적 거부이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지 않는 다수의 선량한 이들은 왜 원죄의 굴레에서 고통 받아야 하는가. 더 나아가 왜 성모님만 특별히 원죄에서 해방되셨나. 교회는 이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우리가 이제부터 다루려고 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는 한국 교회에게 있어서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서울 세나뚜스 이름이 ‘무염시태’이고, 전국 많은 성당이 무염시태 성모님을 주보로 모시고 있다. 무엇보다도 1841년 이래 한국교회의 수호자가 바로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이다. 1854년 무염시태 교리가 선포되기 13년 전부터, 한국 교회는 이미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 의지해온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해야 할 일이 명확해 졌다. 우리는 과연 그 의미를 제대로 알고 무염시태 신앙을 고백하는 것일까. 물론 믿음은 은총으로 거저 주어지는 것이지만, 이미 받은 것을 깨닫는 것은 우리 각자의 몫이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을 방문하는 고품격 패키지 신앙 여행으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그런데 그 신비의 여행으로 떠나기에 앞서, 원죄 자체에 대한 숙고를 먼저 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원죄 없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원죄’가 무엇인지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의 방’은 잠시 뒤에 가기로 하고…. 일단 먼저 ‘원죄의 방’으로 들어가는 문을 조심스럽게 연다. 어두운 기운이 가득하다. 기도가 저절로 나온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모후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김광수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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