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마리아의 아들 수도회의 커뮤니티입니다.

묵상나눔

소녀 마리아의 봉헌 : 교회가 놓지 않았던 기억의 끈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5,952회 작성일 20-06-20 09:27

본문



 

안나와 요아킴은 늘그막에 얻은 특별한 아기를 금이야 옥이야 소중하게 키웠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세월 참 빠르다. 그 예쁜 공주님이 벌써 3살이다. 안나와 요아킴은 과거 하느님과의 약속을 기억해 낸다. 자녀를 주신다면 하느님께 봉헌하겠다는 그 약속 말이다.

당시 율법에 따르면 산모는 남자 아이를 낳건, 여자 아이를 낳건 몸을 풀 시기가 되면 비둘기 혹은 어리양을 성전에 봉헌해야 했다.(레위 12,6-7 참조) 그리고 태어난 아이가 맏이일 경우, 그 아이를 성전에 봉헌해야 했다. , 이 때 봉헌되는 자녀는 아들이었다.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맏아들, 곧 태를 맨 먼저 열고 나온 첫아들은 모두 나에게 봉헌하여라. 사람뿐 아니라 짐승의 맏배도 나의 것이다.” (탈출 13,2)

따라서 딸은 봉헌하지 않아도 됐다. 그렇지만 안나와 요아킴은 하느님이 자녀를 점지해 준다면 아들이건 딸이건 성전에 봉헌하겠다고 이미 약속한 터였다. 그들은 이제 약속을 지키기로 마음먹는다.

 

그 내용이 위경(Apocrypha)인 야고보 원복음(Protoevangelium Jacobi, 서기 200년경)에 자세히 나와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책이 위경이라는 이유로 그 내용을 전적으로 부정하기는 힘들다. 초대교회부터 널리 퍼져 있었던 믿음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 긴 내용이지만, 마리아 봉헌과 관련한 내용을 옮겨본다.

아이가 세 살이 되자, 요아킴이 히브리인들의 정숙한 딸들에게 각자 등불을 켜들고 오라고 초대합시다. 아이가 주님의 성전에서 마음을 붙이고 친가에 돌아오지 않도록 합시다라고 말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성전으로 올라갔다. 대사제가 마리아를 받아들여 축복하고는 마리아, 주 하느님이 네 이름을 영원히 빛나게 했고, 이스라엘의 자녀들에게 너를 통해서 영원히 구원을 보여 주었다라고 말했다. 대사제가 마리아를 제대의 세 번째 계단에 내려놓자, 주님이 힘을 주어 마리아가 스스로 춤을 주었다.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이 마리아를 사랑했다.”(야고보 원복음 7,1-8,1)

이후 마리아는 성전에서 다른 소녀들과 함께 거룩한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다. 이 이야기는 초기 교회 이후 오랫동안 신앙인들의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 잡았고, 교회는 그 전통을 지금까지 잘 보존하고 있다.

 

아기 성모님의 봉헌을 처음 의미 있게 바라본 것은 교황이 살고 있던 곳이 아닌, 동방이었다. 동로마 제국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통치하고 있었기에 더 각별한 의미로 다가왔을 것이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us, 483~565, 이스탄불의 성 소피아 대성당을 건축한 황제다)5431121일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자리에 큰 교회를 건축한다. 아기 마리아의 봉헌을 기억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성당은 지금 없다. 100년도 채 지나지 않아 페르시아의 침략으로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후에도 동방 교회는 교부 제르마노(715~730)가 관련 강론 기록을 남기는 등 꾸준히 아기 마리아의 봉헌을 기념했는데, 이 소식이 훗날(1372) 로마의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에게 전해졌다. 그동안 마리아의 봉헌 의미를 잊고 있었던 로마는 즉시 1121일을 성모자헌기념일로 정했다. 이후 1585년 교황 식스토 5세는 이 기념일을 전교회 차원에서 지내게 하였다. 그렇게 교회 전례 안에 정착된 것이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자헌 기념일’(1121, Festum in praesentatione)이다.

 

교회가 이 기억의 끈을 놓아버렸다면 우리는 아마도 아기 마리아의 봉헌에 대한 아름다운 신심 전통을 까맣게 잊고 지냈을 것이다. 그래서 교황 바오로 6세는 사도적 권고 마리아 공경(1974) 8항에서 이렇게 말했다. “외경적인 요소는 차치하더라도, 탁월하고 모범적인 가치를 보이고 있는 이 축일은 특히 동방에서 기원하여 유서 깊은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증이 생긴다. 분명 아기 마리아를 봉헌한 것은 안나와 요아킴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성모 자헌을 기념한다. 여기서 자헌(自獻)은 자신의 모든 행위, 나아가 자신 전체를 하느님께 스스로 바치는 행위를 말한다. 3살짜리 꼬마 여자아이가 스스로 자신을 봉헌했다? 얼핏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하지만 이는 인간의 눈이 아닌 하느님 차원에서 보아야 한다. 놀라운 구원 섭리의 출발점은 하느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지만(원죄 없는 잉태), 인간으로서의 첫 응답은 아기 마리아의 봉헌 즉 성모자헌을 통해 이뤄졌다. 교회의 오랜 신심은 마리아가 부모의 봉헌 행위를 통하여 자신을 스스로 하느님께 바쳤다고 본다. 교리적으로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지만, 교회는 마리아의 봉헌 자체가 자헌의 상징이라고 신앙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두 번째 응답, 두 번째 봉헌이 기다리고 있다. 훗날 처녀 마리아는 천사의 방문 때, 자헌 때와 똑같은 방식으로(3살 꼬마 여자아이가 그렇게 했듯이) 하느님 섭리를 받아들일 것이다.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 한 사람이 성장하는데 있어서 어린 시절의 환경은 참으로 중요하다. 3살 아기 성모는 아장아장 걸을 때부터 하느님의 성전에서 생활한다. 마리아의 마음속에 오직 하느님 신앙이 자리 잡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만약 아들딸 줄줄이 있는 가정에서 태어났다면 마리아는 성전에 봉헌되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성전 봉헌은 아들만 대상으로 했기 때문이다. 아들이건 딸이건 자식을 주기만 하면 무조건 성전에 봉헌하겠다고 약속한 그 집에서 마리아가 태어난 것은 섭리가 아닐 수 없다.




김광수 요한 보스코 신부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