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죄의 의미- 가톨릭 신앙 열차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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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6,447회 작성일 20-03-11 23:33본문
인간은 본래부터 선善한 존재일까. 아니면 악惡한 존재일까. 성선설性善說이 옳을까, 성악설性惡說이 옳을까. 맹자孟子, BC 372?~BC 289?의 강의를 충실히 들은 사람은 ‘성선설’에 한 표를 던질 것이다. 맹자는 “어린아이가 우물에 들어가려고 하는 것을 보면 사람이면 누구나 깜짝 놀라며 달려가 구한다. 이는 그 어린아이의 부모와 사귀기 위한 것이 아니고, 어린아이를 구해 주었다는 명예를 얻기 위함도 아니다”「맹자」 공손추 상편 참조라고 했다. 그렇게 맹자는 인간의 성품이 본래부터 선善하다고 봤다.
이러한 맹자의 성선설 열차 반대편에서 마주보고 달려오는 열차가 있다. 성악설이 그것이다. 순자荀子, BC 298~BC 238는 사람의 타고난 본성은 악惡하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누구나 다 관능적 욕망과 충동을 가지고 있고,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게 되어 있다고 본 것이다. 다툼과 반목, 그리고 이로 인한 사회적 혼란이 생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래서 순자는 교육, 교정과 같은 후천적 노력이 필요하다며, 예의禮義와 사법師法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런데 성선설이나 성악설은 고대 중국에서 있었던 이야기이고…. 성선설 열차와 성악설 열차가 정면충돌을 하건 말건 우리가 상관할 바 아니다. 어느 열차가 더 튼튼한지 생각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다른 열차를 타면 되니까 말이다. 가톨릭 신앙 열차가 그것이다.
그렇다면 가톨릭교회에서는 성선설과 성악설 중 무엇을 지지할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선설도 아니고 성악설도 아니다. 가톨릭교회의 관점에서 인간은 성선설이나 성악설로 규정지을 수 있는 그렇게 단순한 존재가 아니다.
성경은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고 말함과 동시에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다”(로마 5,12)고도 한다. 소위 말하는 성선설과 성악설의 입장이 동시에 개진되고 있는 셈이다.
적절한 비유가 될지 모르겠지만, 가톨릭에서 말하는 인간은 ‘크고 딱딱한 씨를 갖고 있는 맛있는 복숭아’에 가깝다. 즉 복숭아는 맛있지만善, 중심에는 먹지 못해 버려야 하는 딱딱한 씨惡를 가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느님에 의해 자유의지까지 갖춘 완벽한 존재로 창조되었다. 탐스럽고 아름다운 복숭아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는 악의 유혹에 넘어가 역사의 시초부터 자유의지를 남용하여, 하느님께 받은 원초적인 거룩함과 의로움을 잃어버렸다. 그렇게 아담과 하와는 후손들에게 손상된 인간 본성을 전해 주었다.
이 상실을 ‘원죄’原罪, peccatum originale라고 한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원죄를 안고 태어난다. 이때 원죄는, 따라 배우는 ‘모방을 통해’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출산을 통해’ 인간 본성과 함께 전달된다. 그래서 그 누구도 원죄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인간 본성이 온전히 타락한 것은 아니다. ‘죄에 기우는 성향’이 내려오는 것이다. 원죄의 결과로 선한 인간 본성은 그 힘이 약해져서, 무지와 고통과 죽음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죄로 기울게 되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원죄에 물든 상태로 이 세상에 왔다고 해서, 또 지속적으로 고단한 영적 투쟁을 벌여야 한다고 해서 낙담할 필요는 없다. 그리스도께서 죄를 이기셨기 때문이다. 가톨릭 신앙 열차 탑승객들에게는 죄가 빼앗아 간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주어진다.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 5,20)
그리스도인은 이 세계가 창조주의 사랑으로 창조되고 보존된다고 믿는다. 죄의 노예 상태에 떨어졌으나,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해방시키신 이 세계는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마침내 완성될 것이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409~421 참조) 그 예표가 바로 성모 마리아이다.
우리는 지금 가톨릭 신앙 열차를 타고 목적지를 향해 달리고 있다. 희망의 열차이긴 하지만, 열차 안 분위기가 내내 밝기만 한 것은 아니다. 모두 원죄를 가지고 이 세상에 왔기 때문일까. 때로는 특실로 가려는 욕심과 이를 막으려는 권위의식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기도 한다. 식당 칸에서는 서로 맛있는 것을 먹으려는 싸움도 벌어진다. 열차의 목적지를 두고도 내가 옳다, 네가 그르다는 목소리들로 시끄러울 때가 많다. 모두 죄인인데도 다툼과 반목, 시기와 질투, 고독과 소외 속에서 도토리 키 재기를 하고 있다.
이 혼란 속에서 유독 눈길을 끄는 한 분이 있다. 고결하고 한없이 깨끗한 분…. 열차에 탄 사람 중 유일하게 원죄에 물들지 않은 분, 마리아다. 모든 사람이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는데, 교회는 왜 마리아 한 사람만 콕 집어서 원죄 없이 이 세상에 왔다고 가르칠까. 그 근거가 궁금하다.
김광수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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