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요아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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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6,419회 작성일 20-01-09 22:50본문
안중근 토마스 의사의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가 감옥에 있는 아들에게 편지를 쓴다. “너의 죽음은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는 것이다.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너의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의연하기 때문에 더 가슴 아프다. 이 편지는 구전되는 것일 뿐 실제 기록으로는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십자가에 매달리는 아들을 바라보며 속눈물 펑펑 쏟는 마리아 어머니의 심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그 어머니의 편지에 31세 아들이 답장을 쓴다. “훗날 영원히 천당에서 만나 뵈올 것을 바라옵니다. … 드릴 말씀은 허다하오니 후일 천당에서 기쁘게 만나 뵈온 뒤 누누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위대한 영웅 뒤에는 늘 위대한 어머니가 있었다. 고구려 시조 주몽의 어머니 유화부인, 아들을 통일 역군으로 키워낸 김유신의 어머니 만명부인, 성웅 이순신을 길러낸 어머니 초계 변 씨…. 영웅을 기억하면서 그들의 어머니를 기억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구세주의 어머니 마리아를 기억하고 공경하는 이유다. 그렇다면 여기서 기억의 꼬리를 하나 더 이어가 보자.
그 구세주 어머니의 어머니는 누구셨을까. 또 마리아 어머니의 아버지는 누구셨을까. 2000년 그리스도교 신앙은 그들을 안나Anna, 그리고 요아킴Joachim이라고 기억한다.(두 성인의 축일은 7월 26일이다.)
개신교에서는 안나와 요아킴을 기억하지 않는다. 성경에 그 이름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 정경 목록에 들어가지 않는 위경Apocrypha으로 간주되는 책들 중 ‘야고보 원복음’ 서기 200년경은 마리아의 부모 이름을 안나와 요아킴이라고 적시하고 있다. 위경이라는 이유로 그 내용을 전적으로 부정하기는 힘들다. 초대교회부터 널리 퍼져 있었던 믿음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안나와 요아킴에 대한 기억은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 등 가톨릭과 개신교 신앙의 근간을 확립시켜 준 교부들을 통해서도 확인되고 있다.
‘야고보 원복음’에 따르면, 요아킴은 부유했으며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와 짝을 이룬 아내 안나는 베들레헴 출신(나자렛 출신이며 유목민 아카르의 딸이라는 전승도 있다)의 여인이었다. 야고보 원복음서 기록을 우선 신뢰하자면 예수님은 외할머니와 출생지가 같았던 셈이다. 그런데 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았던 요아킴 안나 부부에게도 걱정거리가 있었다. 결혼한 지 20년이 지나도록 아이가 없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 아이가 없다는 것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에 요아킴은 광야로 나가 40일간 단식하며 자녀를 청하는 기도를 바쳤다. 안나도 기도 중에 ‘아이를 낳으면 주님께 봉헌하겠습니다’라고 약속했다. 이때 하느님은 천사를 안나에게 보내 ‘이제 잉태해 아이를 낳을 것이며, 그 아이는 온 세상에 이름을 떨칠 것’이라고 예고한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광경이다. 구약성경에서 ‘한나’가 사무엘을 얻는 이야기 판박이다.1사무 1,9-20 참조 한나는 아기를 낳지 못하자 눈물로 날을 보냈다. 그러자 애처가 남편 엘카나가 말한다. “한나, 왜 울기만 하오? 당신에게는 이 남편이 아들 열보다 더 낫지 않소”
남편의 위로도 한나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한나는 기도한다. “아들 하나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면 아이를 주님께 바치겠습니다.” 이후 한나는 임신했고, 그렇게 사무엘을 낳았다.
우연의 일치일까. 안나Anna라는 이름은 구약 히브리어 한나Hannah와 같은 이름이다. 게다가 사무엘은 판관 시대에서 왕의 시대로 넘어가는 분기점에 서 있는 인물이다. 한나의 아들 사무엘이 다윗 왕 시대를 예고하는 인물이라면, 안나의 딸 마리아는 그리스도 왕 시대를 예고하는 인물이다.
이 점에서 안나와 요아킴은 구약을 성취하는 신약의 디딤돌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교회가 2000년 동안 예수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이름을 기억해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본당에서 할아버지 모임을 ‘요아킴회’, 할머니 모임을 ‘안나회’라고 칭하는 전통도 이러한 2000년 신앙 전승에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초기교회 당시에는 예수님과 성모님에 대한 관심이 워낙 컸던 탓에 안나와 요아킴에 대한 공경이 상대적으로 미미했다. 하지만 6세기에 접어들면서 신앙인들은 안나와 요아킴을 다시 기억에 떠올리고 본격적으로 공경의 대상으로 삼았다. 특히 8세기에 황제가 콘스탄티노플터키 이스탄불의 안나 무덤이라고 알려진 곳에 성당을 세우면서, 동방 교회를 중심으로 안나와 요아킴 공경이 날개를 달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중세 후기,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에 대한 신심이 확산되면서 안나와 요아킴의 인기는 절정에 달했다.
지금 우리가 안나와 요아킴을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이처럼 2000년 동안 교회가 안나와 요아킴에 대한 공경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바통에 바통을 이어 주었기 때문이다.
진통이 찾아왔다. 그 고통의 끝자락에 아기가 태어난다. 여자 아이였다.
김광수 요한 보스코 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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