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칼럼_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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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4,904회 작성일 21-02-22 09:43본문
* 이 글 제목과 소재는 모노 드라마 형식의 연극 ‘빨간 피터의 고백’ 원제인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의 단편 소설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Ein Bericht fur eine Akademie, 1917)에서 빌려왔습니다.
존경하는 학술원 제현(諸賢) 여러분!
여러분께서는 영광스럽게도 제가 원숭이로 살던 시절에 관해 학술원에 보고해달라는 과제를 주셨습니다. 여러분의 도움으로 원숭이에서 진화해 인간이 된 저는 그 은혜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기대에 부응할지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해 보고 드리겠습니다.
저는 빛조차 발걸음을 꺼리는 깊은 밀림에서 태어났습니다. 전 유난히 호기심이 많은 아이였는데, 어머니께선 늘 그 점을 걱정하셨지요. 결국 그 호기심이 일을 냈습니다. 인간들이 사는 마을을 기웃거리다 붙잡힌 것입니다. 곧 작은 우리에 갇혔습니다. 답답했습니다. 하지만 이내 편안해 졌습니다. 정신없이 이 나무 저 나무를 뛰어 다닐 때는 몰랐는데,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자 세상을 좀 더 넓게 볼 수 있었습니다. 전 인간들을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인간들은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많이 했습니다. 말로는 평화를 원한다면서도, 늘 싸움을 했습니다. 이렇게 말이죠.
“넌 나를 항상 반대하지” “난 너를 항상 반대하는 것은 아니야” “보라구, 넌 또 날 반대하잖아”
제가 보기엔 인간 사회는 중병에 걸려 있었습니다. 특히 그 오만함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인간은 자신들만이 불을 사용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오스트레일리아 솔개는 불타는 나뭇가지를 발톱으로 쥐고 옮겨 의도적으로 불을 일으킵니다. 먹이를 은신처에서 몰아내 사냥을 쉽게 하기 위해서죠.
인간은 오만함 이외에도 무기력, 좌절, 절망 등의 증세도 심했습니다. 문제는 병의 원인이 계층간 갈등, 노사 갈등, 지역 갈등, 종교 갈등, 민족 갈등, 이념 갈등 등 복합적이어서 처방이 쉽지 않다는 점입니다. 판도라가 상자를 열었을 때 세상 밖으로 뛰쳐나왔다는 질투, 원한, 복수심 등도 병의 악화에 한몫 했습니다.
그런데도 병을 치료할 의사는 의견을 하나로 모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처방이 중구난방입니다. 인간들은 제각기 자신이 전문가라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심지어 다른 의사가 진료하지 못하게 실력행사에 나서기도 합니다. 그러는 사이 수술대 위 환자는 점점 더 위험한 상황으로 치달았습니다.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습니다. 그 완고함과 완고함이 격돌합니다. 설익은 지식으로 무장한 이 시대의 인간들은 마치 격분과 원한으로 핏줄이 터질 듯한 뇌의 상태를 진정시키기 위해선, 땅을 덮을 정도의 피가 필요하다고 외치는 듯합니다.
농사를 이야기하는 사람은 많은데 토지는 황폐해졌습니다. 쟁기를 잡는 사람이 적기 때문이었습니다. 간혹 용기내어 쟁기를 잡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 사람도 자꾸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너도나도 병법(兵法)을 말했지만 군대는 점점 약해져 갔습니다. 무기를 드는 사람이 적기 때문이었습니다.
아! 질문을 하시는 분이 계시는 군요. 예? 좀 크게 말씀해 주십시오. 아! 좋은 질문입니다. 인간 사회가 그토록 암울한데 왜 인간이 되길 소망했냐구요?
맞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인간이 되고 싶었습니다. 인간만이 ‘희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판도라의 상자에는 희망도 함께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원숭이였던 시절에는 희망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희망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압니다. 원숭이 시절에 제가 믿었던 종교에선 먹고 마시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인간들이 믿는 그리스도교는 십자가 고통이 부활의 열매를 약속한다고 가르칩니다. 부활 희망을 만끽하기 위해 전 원숭이이기를 포기했습니다. 부활 희망이 있기에 인간이 겪는 고통을 감수해 내기로 했습니다.
할 일이 많습니다. 시간이 촉박합니다. 원숭이였던 시절의 모든 습관을 버리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완성된 인간이 되기 위해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하느님의 가르침을 정확히 볼 줄 알면, 걸음이 흔들리지 않는다고 배웠습니다(시편 37,31 참조). 그 우직한 걸음으로 누가 1000걸음을 가자고 하면, 2000걸음도 가 줄 생각입니다(마태 5,41 참조). 늘 겸손한 자세로, 부활 희망을 꿈꾸며 살겠습니다. 그 희망을 ‘지금 여기서’ 실현시키기 위해 땀 흘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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