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左)? 우(右)?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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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5,071회 작성일 21-02-15 09:49본문
싸움판이다. 아이들이 하는 톡탁톡탁 말 싸움 수준이 아니다. 나와 다른 의견에는 여지없이 몰매를 가한다. 상대방의 영혼을 파괴라도 시키려는 듯, 작심하고 달려든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은 ‘무지에서 일깨워야 할 계몽의 대상’일 뿐이다. 그러다 보니 듣지 않는다. 마치 입이 두 개, 귀가 하나인 괴물처럼 살아간다. 그 목표 혹은 결과는 승자독식(勝者獨食)이다. 이 같은 현상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모든 면에서 예외가 아니다.
물론 갈등은 더 나은 미래를 향한 변증법적 몸부림일 수 있다. 특히 신앙인인 우리는 갈등이 구원사 속에서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마태 10,34 참조) 하지만 최근 한국 사회의 갈등에선 희망을 발견하기 힘들다. 선로 전환기 고장난 기찻길 위에선 마주오던 두 열차가 충돌할 수 밖에 없다.
한국사회가 갓끈 풀어 헤치고 드잡이 하는 이런 형국이 된데는 ‘치우침’의 영향이 크다. ‘치우침’에서 벗어나야 한다. 특히 좌와 우를 가르는 이원론은 곤란하다. 미국의 외교 군사전략은 지나치게 피아(彼我)를 구분한다. 선과 악의 이원론에 바탕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善)의 반대말은 불선(不善)이지 악(惡)이 아니다. 천사의 반대말은 타락한 천사이지 악마가 아니다.
앞(前)도 있고 뒤(後)도 있고, 위(上)도 있고 아래(下)도 있다. 반드시 좌(左)와 우(右)만 있는 것이 아니다. 좀 더 넓게 보자는 말이다. ‘공격’ 혹은 ‘가르치려는 태도’‘상처 주기’가 아닌 ‘대화’ ‘배우려는 태도’ ‘감싸 주기’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자신의 생각 안에서만 머물고 판단하고 행동한다면 그것은 신앙인의 올바른 자세가 아니다. ‘신앙을 가진다는 것 = 비움’이다. 이상은 완벽하지만, 그 이상을 실천하고 적용하는 인간은 나약하다. 그렇다면 비우고 겸손해야 한다. 하느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는 사건 앞에선 단호하고 강력하게 대처해야 하지만, 세상 모든 이를 향한 공정함과 온화함을 잃지 않는 균형이 필요하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한 때 유행했던 개신교의 ‘변증법적 신학’(dialektische Theologie)은 현재 폐기 처분 됐지만, 그 동기에 대해선 부분적으로나마 곰곰이 새겨 볼 만하다. 변증법적 신학은 인간의 죄성(罪性)과 나약함을 강조했으며 신의 초월성을 부각시켰다. 근대적 진보사관(進步史觀)도 반대했다. 계몽주의가 평가절하시켰던 종교를 무리하게 평가절상시켰다. 물질주의와 독단적 이성이 판을 치는 이 시대, 어느 정도는 신앙의 가치와 신의 초월성을 평가절상 시킬 필요가 있다.
인간의 위대함은 스스로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무릎 꿇어 기도하는데 있다. 겸손은 오만, 경외와 함께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단어다. 이성만으로는 부족하다. 인류에게 쏟아지고 있는 은총을 사랑으로 구체화하겠다는 따뜻한 마음, 겸손한 감성이 필요하다. 하느님 나라는 따뜻한 감성을 가진 사람들이 사랑을 누리고 나누는 은총의 나라다. 우리는 지나치게 이성의 힘에 의존해 좌와 우의 편 가르기를 하는 것은 아닌지 반성할 필요가 있다.
그 모범을 고 김수환 추기경에서 본다. 김 추기경은 좌도 우도 아니었다. 사형제 폐지를 주장한 것은 소위 진보적 견해였지만, 낙태와 관련해서는 철저히 보수적이었다. 그래서 김 추기경은 좌와 우, 양쪽 모두의 입맛에 맞지 않았다. 사실 추기경이 말한 모든 것은 ‘사랑’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김 추기경은 사랑을 사랑했다. 불가피한 싸움을 해야 한다면 그 싸움도 ‘사랑하기 위한 싸움’이었다.
신앙인이라면 일반인들의 선택과는 달라야 한다. 사랑은 좌와 우, 양극단을 조율하는 선분 위의 가운데 점이 아니다. ‘하느님 나라’라는 원(圓)의 중심이다. 김 추기경은 1986년 3월, 정의와 평화를 구하는 9일 기도 메시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기 위한 싸움에서 미움만이 남아있는 경우가 없지 않은지 우리는 반성해야 합니다. … 먼저 하느님과 화해해야 합니다.”
편집장 우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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