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칼럼_신부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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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5,314회 작성일 21-01-13 11:42본문
‘형!’어린 시절 한 마을에서 성장한 신부님께 저는 ‘형’이라 불렀지요. 호칭만 형이 아니었습니다. 친형처럼 다가온 신부님은 저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 처럼 바보로 살아야 한다”고 하셨고, “겸손함이 세상 모든 것을 이긴다”고도 하셨습니다. 그림을 좋아하셨던 신부님은 그래서 ‘바보 예수’를 즐겨 그리셨지요.
신부님은 당신이 그리신 ‘바보 예수’를 닮으셨습니다. 당신은 심각한 과묵의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수백 수천 화살이 쏟아지듯 날아오는 그런 분위기는 더더욱 아니었습니다. 꾸며진 겸손이 없었습니다. 늘 밝고 화창했습니다. 멍석만 깔아주면 혼자서라도 웬만한 신앙 잔치 하나씩은 너끈히 치러낼 그런 활기가 가득 하셨습니다. 그런 신부님을 항상 마음으로 존경했습니다.
신부님과 관련해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운 추억이 있습니다. 신부님께서 신학생이시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저에게 손안에 쏙 들어오는 작은 목각상 하나를 선물하셨지요. ‘팔 없는 예수’였습니다. 기억하시는지요. 신부님은 그 목각상을 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팔 없는 예수님의 팔이 되어라.”
그리고 덧붙이셨습니다. “네가 훌륭한 사제가 되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저는 신부님의 기대와는 달리 사제가 되지 못했지요. 그래서인지 지금 ‘예수님의 팔’로 살아가시는 신부님이 부럽습니다. 범접하기 힘든 성자(聖者)가 아닌, 평범한 사제의 그 모습이 더 부럽습니다. 젊은 사제의 왕성한 혈기가 아닌 중년 사제의 넉넉한‘허허’웃음에서 더 심한 영적 갈증을 느낍니다.
그래서 신부님 처럼 늘 깊이있는 신앙을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먼저 저 자신이 변화되기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평신도로서 더 깊은 영성을 갖추기 위해 스스로 기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팔이 되라”는 명령은 너를 향한 것이 아니라 나를 향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본당이 활성화 되려면 훌륭한 신부님이 오셔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학업의 성취는 스승의 자질보다는 배우는 학생의 자질에 더 크게 좌우되는 법입니다. 본당 활성화도 가르치는 쪽의 자질보다는 배우는 쪽의 자질에 좌우되는 경향이 더 큽니다.
나를 되돌아 봅니다. 더 나아가 한국교회 평신도 사도직도 함께 반성해 봅니다. 과연 진리와 신앙을 위해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 신앙 열정을 가지고 살아왔는지, 또 이웃을 향한 배려와 비움, 완전한 내려놓음을 실천했는지, 삶이 힘들어 하늘을 향해 투정만 부리지 않았는지, 책임을 성직자와 수도자에게로 돌리지 않았는지….
다시 마음을 다잡아 봅니다. 신앙인은 힘들다고 주저앉지 않아야 합니다. 뒤쳐져서 앞 사람을 향해 손가락질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를 따르고, 그 하나를 성취하겠다는 열정만 있으면 됩니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걱정은 필요 없겠지요. 일을 주는 분은 그 일을 해낼 힘도 함께 주시니까요.
어두운 우물 바닥에 오래 앉아 있다 보니 자칫 나에게 내려진 구원의 밧줄을 뱀으로 착각하고 살아오지 않았는지 묵상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밧줄이 내려진 나를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데, 정작 나는 밧줄이 무서워 잡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달라지겠습니다.
팔 없는 예수 목각상을 떠올려 봅니다. 팔 없는 예수님의 팔이 되라 하신 신부님의 말씀도 다시 한 번 묵상해 봅니다. 저와 이 땅의 평신도들이 모두 팔 없는 예수님의 팔이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신부님…. 요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보고 싶습니다.
비타꼰 주간 우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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