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칼럼_비가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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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865회 작성일 21-07-05 09:20본문
편집장 신앙칼럼
- 비가 옵니다
추적추적 비가 오던 날이었습니다. 허름한 호프집에서 만난 당신은 수척한 모습이었습니다. 맥주 첫 잔을 비울 즈음 당신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씀하셨지요.
“외국으로 발령 받았습니다. 두 달 후에 떠납니다.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언제 한국으로 다시 돌아올지 모른다는 수사 신부님의 말에 순간 당황했습니다. 이렇게 훌쩍 떠나시다니요. 당신은 그동안 많은 이들에게 사랑의 모범이셨습니다. 힘들 때 연락하면, 한 번도 거절하지 않고 만나 주셨습니다. 예리한 칼날에 베어 아파할 때, 그 상처를 지그시 눌러 지혈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 몸에 낭자한 흉터들을 직접 열어 보여주시며 “누구나 흉터 하나씩은 갖고 살아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난 세월의 추억들을 떠올려 봅니다. 당신은 나쁜 남자 B형 혈액형이 아니십니다. 현미경으로 보면 혈액 형태도 동글동글하게 나타난다는 그런 O형도 아니십니다. 신부님은 한국인의 34%를 차지한다는 A형, 소심하면서도 꼼꼼한 ‘수도자 스타일’ 이십니다. 성실하고 예의가 바르며 배려가 남다르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완벽을 꾀하느라 돌다리를 두드리셨습니다. 그래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기도 하셨습니다. 또 타인의 시선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어서 작은 평가에도 상처를 쉽게 받곤 하셨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신부님을 사랑했습니다. 당신의 소박한 순수함에 매료된 것이죠.
그런 신부님이 부럽습니다. 제가 의자를 바짝 끌어 당겨 다가가 앉으며 말한 것, 기억하시는지요.
“당신이 부럽습니다.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사제를 만날 때 마다 부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직 이웃의 행복만 걱정하는 신부님의 따뜻한 마음이 부럽습니다. 절대자와 사랑을 하고, 또 평생 동안 그 사랑을 키우며 사는 신부님을 보면 질투가 날 정도로 부럽습니다.”
평생을 독신으로 참하게 살아가는 가톨릭 사제는 하느님으로부터 받는 선물이 많습니다. 혼자 있고 싶을 때 늘 혼자 있을 수 있고, 공부하고 싶으면 공부할 수 있고, 본당을 확 바꿔 놓고 싶으면 온 정열을 바쳐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조용한 곳으로 떠나 기도하고 싶으면 기도하면 되고, 특수사목 분야에 남다른 관심이 있다면 그렇게 하면 됩니다. 무엇보다도 모든 것을 다 바쳐 세상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삶을 보면 톨스토이가 소설 「크로이처 소나타」에서 독신의 미덕을 열렬히 찬양한 이유를 알 것도 같습니다.
예술과 문학, 정의, 인류애, 신앙 등을 위해 인생을 건 사람들의 이야기는 감동을 줍니다. 신부님의 삶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 내어 던지는 투신의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신부님의 삶은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단순히 부러워 하지만은 않겠습니다. 당신의 삶을 배우고 따르겠습니다. 당신처럼 늘 웃겠습니다. 신앙 안에서 ‘환함’을 추구하고 살겠습니다. 욕심을 끊고,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가능할까?’라는 걱정은 하지 않겠습니다. 일을 주시는 분은 그 일을 해낼 힘도 함께 주시니까요.
주위를 한 순간에 얼음으로 만들어 버리는 신부님의 썰렁 유머를 이젠 더 이상 들을 수 없겠군요. 그리워 할 겁니다.
당신이 보여준 ‘믿음’을 따라 배우겠습니다. 그 믿음의 삶 속에서 언젠가 신부님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소망’을 품어봅니다. 그리고…. 당신을 ‘사랑’합니다.
지금 혼자서 맥주잔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보고 싶습니다. 비가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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