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사벳을 방문하다 : 모든 여인 중에 가장 복된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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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4,402회 작성일 21-05-14 17:07본문
사진 설명 : 이스라엘 아인 카렘(Ein Karem, 세례자 요한의 고향)에 있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기념 성당’ 의 ‘마리아와 엘리사벳 조형물.’
상식적으로 이 정도 상황이라면 심리적 공황상태에 빠져야 옳다. 처녀의 몸으로 잉태를 했다. 이해 불가능한 사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예상할 수조차 없다. 보통 사람이라면 다가올 미래에 대한 불안, 초조, 의구심, 자포자기, 한탄으로 하루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이렇게 마음에 병이 들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집 밖에 잘 나가지 않는다. 사람 만나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 방 안에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마리아는 달랐다. 마리아의 모습에서는 그 어떤 분열된 내면도 찾아볼 수 없다. 피해의식도, 자만심도, 자기 합리화도, 우울증도 없다. 씩씩하다. 그래서 마리아는 지금 자신 있게 집을 나선다.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루카 1,39)
목적지는 엘리사벳의 집이었다. 마리아는 이미 가브리엘 대천사를 통해 나이 많은 엘리사벳이 아기를 가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리아는 가브리엘 대천사로부터 이런 말을 들은 바 있다.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6-37)
마리아는 자신의 상황을 가장 잘 이해해줄 사람이 엘리사벳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엘리사벳이야 말로 성령의 도움을 통한 잉태의 기쁨을 나누기에 가장 적합했던 인물이었다. 그래서 마리아는 ‘서둘러’ 갔다. 기쁨을 나누고 더 큰 의미를 찾기 위한 여정이었다.
그렇게 임신 6개월의 엘리사벳과 이제 막 아기를 잉태한 마리아가 만났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만남은 그렇게 두 어머니의 몸을 빌려 태중에서 먼저 이뤄졌다.
여기서 잠깐! 엘리사벳이 세례자 요한을 잉태한 것과,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한 사건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이를 도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세례자 요한의 출생 예고 (루카 1,5-25)
| 예수 탄생 예고 (루카 1,26-38) |
- 예고 장소 : 예루살렘 - 잉태 원인 : 즈카르야와 엘리사벳 - 잉태 동기 : ‘너의 청원’ (낮은 곳으로 부터) - 예고에 대한 반응 : 즈카르야의 의심 |
- 예고 장소 : 갈릴레아 나자렛 - 잉태 원인 : 하느님의 은총 - 잉태 동기 :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위로부터) - 예고에 대한 반응 : 마리아의 “네”(Fi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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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틀과 형식, 과정이 어쨌건, 하느님 섭리의 정중앙에 선 두 여인이다. 그들은 하느님 섭리를 몸으로 체험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아줄로 연결되어 있다. 섭리가 생명으로 왔고, 여인들은 살아 숨 쉬는 그 생명을 몸으로 생생히 느끼고 있다. 그 두 여인이 지금 손을 붙잡고 떨어질 줄 모른다.
먼저 인사를 건넨 쪽은 마리아였다. 그러자 엘리사벳의 태 안에서 아기(훗날의 세례자 요한)가 뛰놀았다! 아기의 요동치는 발길질, 그것은 하나의 버튼이었다. 버튼이 눌러지자 동시에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충만해 진다. 그 충만함 속에서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참으로 위대한 분을 몸 안에 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감격에 차서 마리아에게 말한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2-45)
성령이 얼마나 위대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다시한번 알게 되는 대목이다. 성령의 힘이 아니라면 마리아를 어떻게 주님의 어머니로 고백할 수 있겠는가. 성령의 눈으로 보지 않는다면 마리아가 어떻게 가장 복된 여인임을 알아볼 수 있겠는가. 마리아를 이렇게 찬미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성령의 힘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엘리사벳은 알고 있었다. 비록 가슴 찢어지는 아픔을 겪기도 하겠지만, 마리아만큼 행복한 여인은 없다는 것을 말이다. 여기서 마리아가 행복한 이유는 하나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연 성령의 충만함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그래서 마리아가 참으로 복되신 분이라고, 참으로 행복한 분이라고 고백하고 있는가. 매일 수없이 성모송을 외우면서도 실상은 복된 어머니의 모습을 만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머니는 참으로 복된 분입니다”라는 기도 하나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데, “어머니, 저를 좀 도와 주세요”라며 열매만 바라는 기도에 매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내 말만 하기 때문에, 엘리사벳의 찬미 뒤에 이어지는 마리아의 노래를 듣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엘리사벳이 선창을 하자, 마리아가 후창을 한다. 이제 마리아의 입에서 위대한 노래가 터져 나온다.
세상에! 나는 지금까지 이렇게 아름다운 노래를 들어본 일이 없다. 마리아의 입에서 처음으로 터져 나온 단어는 ‘마니피캇’(magnificat, 찬양하다)이었다.
김광수 요한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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