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탄생 예고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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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5,394회 작성일 21-01-22 17:38본문
- 사진설명 : 프란체스코 라이볼리니(Francesco Raibolini, 1450~1517)의 ‘주님 탄생 예고’(수태고지, Annunciation, 1505, 이탈리아 밀라노 브레라 미술관)
성모님에게 배우는 ‘아기 예수님과 같은 예쁜 아기를 임신하는 방법!’
▲ 1단계 : 오늘 밤 잠자기 전, 창문을 조금 열어놓는다. 창문이 닫혀 있으면 천사가 들어올 수 없다. 문이 열려있어야 한다. 성모님 마음의 창문은 항상 열려있었다. 가브리엘 대천사는 그 열린 창문으로 들어와 성모님 앞에 섰다.
신앙인에 대한 다양한 정의가 있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또 다른 사람은 ‘하느님께 의탁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대답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런데 이 대답들은 대부분 ‘나’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내가 하느님을 믿고, 내가 하느님께 의탁하는 것이다. 하지만 신앙은 내가 중심 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믿고 따른다고 신앙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중심은 하느님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신앙인에 대한 정확한 정의는 ‘충만함(fulfillment)이라는 선물에 스스로를 개방하는 이들’이다. 성모님처럼 문이 열려 있는 사람이다. 개방하지 않으면 하느님의 뜻이 아닌, 나의 결심, 나의 뜻에 따라 살게 된다. 그래서 기도를 할 때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만 늘어놓는다. “이것을 해 주십시오”“저것을 해 주십시오”라며 내 이야기만 한다. 내 이야기가 아닌 하느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것은 문을 열어 놓는 것이다. 하느님이 주시는 은총이 우리에게 들어오도록 문을 열어야 한다. 마리아의 모범이 말하고 있다. 소나기처럼 이미 내려 주신 충만한 은총을 문을 열어 받아들이는 사람, 그 은총을 발견하고 완성시켜 가는 사람이 진정한 신앙인이라고 말이다.
▲ 2단계 : 인간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을 때는 ‘이의신청’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줄기차게 이의신청만 하면 안된다.
인간이기에, 나약하기에 이의신청(異議申請) 할 수 있다. 하지만 하느님 부르심의 법정에서 이의신청은 무의미하다. 부르는데 도리가 없다. 부르면 가야한다. 물론 구약시대 예언자들도 처음에는 이의신청을 했다. 이사야 예레미야 등 예언자들은 모두 부르심 앞에서 “나는 하느님께서 명하시는 그 일을 하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했다. 모세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또한 대부분 ‘이의신청의 신앙생활’을 한다. 하지만 이의신청 후 곧바로 하느님의 뜻에 따랐던 예언자들과 달리, 우리들은 끝까지 이의신청만 하고 있다.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고, 물러서서 팔짱끼고 관망한다.
성모님도 ‘아주 조금’ 이의신청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라고 하자 마리아는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며 살짝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하지만 성모님은 이내 이의신청을 거둬들이셨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셨다. 여기에 성모님의 위대함이 있다.
▲ 3단계 : 주시는 대로 받는다. 인간적 잣대로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순명하고 받아들인다. 비록 고통스러운 결과가 예상되더라도 말이다. 마리아는 기꺼운 마음으로 ‘네’(Fiat, 루카 1,38)라는 대답을 드림으로써 성령의 감도하심을 통하여 ‘유일하신 중재자’(1티모 2,5)를 잉태하셨다.(바오로 6세 「마리아 공경」 6항)
‘네’(Fiat)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단어가 마리아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천사가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5-37)라고 하자 성모님은 이렇게 응답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성모님은 피동적으로 하느님께 이용당하신 것이 아니다. 자유로운 신앙과 순종으로 인류 구원에 협력하셨다. 이처럼 성모님은 “순종하시어 자신과 온 인류에게 구원의 원인이 되셨다.”(이레네우스 성인의 「이단 반론」, 교회헌장 56 참조)
그런데 이러한 성모님의 겸손과 낮춤을 묵상할 때 주의할 점이 있다. 겸손과 낮춤을 성취하기 위해 스스로 기를 쓰고 노력할 필요는 없다. 원래 낮은 존재인데 낮출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성모님은 겸손하기 위해, 낮추기 위해 의도적으로 노력하지 않았다. 그냥 스스로 낮은 존재라고 생각했다. 이처럼 영성생활은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바로 보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러면 무릎 꿇을 수밖에 없는 보잘 것 없는 자신의 모습이 보이고, 그래서 진정으로 하느님 뜻에 순명할 수 있다.
그 때 하느님은 무릎 꿇은 우리를 손수 잡아 일으켜 세우실 것이다. 성모님은 그렇게 하느님의 부축을 받아 일어나 아기 예수를 잉태하셨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무릎을 꿇고 ‘네’라고 응답할 때, 가슴에 성령을 잉태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때 가슴에 스며들어 잉태되는 성령의 뜨거움은 실로 엄청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또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바로 ‘동정녀 마리아’에 관한 것이다. 마리아는 출산 전에도, 출산 중에도, 출산 후에도 동정녀셨다!
김광수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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