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면 안되는 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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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62,823회 작성일 20-12-10 14:46본문
많은 사람들이 운다.
2010년 초, 아이티 지진 참사 소식을 보도하던 CNN 여성 앵커 캠벨 브라운이 뉴스 도중 울었다. 11살 소녀가 기적적으로 구조돼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결국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참사 현장에서 보도는 계속된다. “소녀가 죽기전 남긴 마지막 말은 ‘엄마! 저 죽지 않게 해주세요’였습니다.” 앵커는 눈물 때문에 말을 잇지 못했다. 눈물은 전염성이 강하다. 그 눈물에 전 세계 시청자들도 함께 울었다.
오늘도 많은 사람이 운다. 세례를 통하여 성령께서 머무시는 성전이 된, 그 몸이 운다. 인권이라는 공기가 사라져 숨 쉬지 못하고 울부짖는 사람들이 많다. 결혼식장의 신부(新婦)도 울고, 서품식장의 신부(神父)도 울고, 금메달을 딴 김연아 스텔라도 운다. 또 암(癌) 덩어리 몸이 아파서 울고, 하루하루 버티는 삶에 지쳐서 울고, 상처입어 곪은 마음이 아파서 운다.
그런데 당연히 울어야 할 상황인데도 울지 않은 사람이 있다. 헬렌 켈러는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눈과 귀와 혀를 빼앗겼지만, 영혼을 잃지 않았기에, 그 모든 것을 가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것은 보이거나 만져지지 않는다. 단지 가슴으로만 느낄 수 있다.”
이런 말도 했다. “행복의 한 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열린다. 그러나 흔히 우리는 닫혀진 면만 오랫동안 보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 열려 있는 문은 보지 못한다.”
헬렌 켈러는 태양 빛을 볼 수 없었던 사람이었다. 소리를 들을 수 없었고, 말도 할 수 없었다.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 그녀에게는 당연하지 않았다. 눈으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당연하지’가 아니다. ‘고마워 하기’가 필요하다. 자녀가 말썽을 피워도 ‘걱정할 아이가 있는 것’ 그 자체를 고마워해야 한다. 반찬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집 청소가 엉망이라도 ‘아내가 밥하고 청소하는게 당연하지’라고 생각해선 안된다. ‘당연하지’라고 생각하니까 반찬투정한다. 바가지 긁는 그 아내가 있는 것 자체를 고마워해야 한다. 행복은 고마워하는 일상에서 찾아온다. 예수회 안소니 드멜로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 “그 누구도 감사하면서, 동시에 불행할 수는 없다.”
감사하지 않으면 스스로의 힘만으로 살려고 한다. 잘난체 한다. 그러면 중심추가 이리저리 흔들린다. 중심을 바로 세우는 것은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을 말한다. 밥은 밥그릇 안에 있어야 아름답다. 밥알이 입 주위에 붙어 있으면 아름답지 않다.
감사하는 마음은 이렇게 우리를 아름답게 하고, 행복으로 이끌며 동시에 영적 성장도 가져온다. 감사하는 사람은 기도 10시간 하고 분노를 겨우 가라앉히지 않는다. 아예 분노가 일어나지 않도록 평상시에 기도한다. 감사하는 사람은 욕심과 이기심을 극복하기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 기도를 통해 욕심과 이기심을 소멸시킨다. 감사하는 사람은 무릎 꿇고 땀 뻘뻘 흘리며 기도한 뒤 “난 널 용서했어”라고 말하지 않는다. 용서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떠오르지 않는다. 누가 누구를 용서한다는 말인가. 이웃을 용서해서 은총 받는 것이 아니라, 은총 받아서 용서할 수 있다.
이렇게 감사할 때, 우리는 웃을 수 있다. 감사의 은총이 충만하기에 웃을 수 있다. 당연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웃을 수 있다. 그래서 신앙인의 얼굴은 밝다. 신앙인은 고통 중에서도 감사와 희망을 품기에 기쁠 수 있다. 희망이 있는데 왜 우는가. 감사한데 왜 우는가. 이제는 울지 말자. 부처를 소망하는 사람이라면, 십자가 들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라면, 마호메트의 진정한 성전을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울지 않는다.
울면 안된다. 울면 안되는 날은 북경반점 쉬는 날이다. 매일 매일이 북경반점 쉬는 날이라고 생각하자. 개인적으로 울면 보다는 자장면을 좋아한다.
비타콘 주간 우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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