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칼럼_죽음에 대하여Ⅱ : '아홉수' 를 넘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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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436회 작성일 21-11-17 10:22본문
지독한 ‘아홉수’였다. 지난 2009년 당시 교회에는 유난히 슬픈 소식이 많았다. 김수환 추기경에 이어 대구대교구 최영수 대주교, 서울대교구 최석우 몬시뇰이 2009년 아홉수 해에 모두 우리 곁을 떠났다.
예부터 어른들은 ‘아홉수를 조심하라’했다. 과거에는 19세 혹은 29세 결혼을 피했다. 액운이 낀다는 것이었다. 한수산(요한 크리소스토모)의 장편소설 「부초」에도 ‘아홉수가 안 좋아서 그런가 보다면서 여인은 혀를 찼다’는 말이 나온다. 아홉수 징크스는 서양에서도 마찬가지다. 유럽에서는 작곡가가 9개의 교향곡을 작곡하면 죽는다는 징크스가 있다. 베토벤, 드보르자크가 그랬다. 그래서 그런지, 숫자 ‘9’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왠지 아슬아슬한 느낌을 준다. ‘10’을 이루기 직전이니까, 뭔가 조심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신앙인이라면 달라야 하지 않을까. 만약 죽음이 그 자체로 끝난다면 아홉수가 꺼려지겠지만,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톨스토이(Lev Nikolayevich Tolstoy, 1828~1910)는 「참회록」에서 “세상의 모든 작가들보다 더 유명해진다고 치자. 죽음 앞에서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나는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이 의문을 가라앉힌 답은 하느님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렇다.‘하느님이 먼저다.’나치에 저항하다 순교한 독일 신학자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는 마지막에 이런 말을 남겼다. “죽을 준비가 되기 전에 죽음이 다가오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준비되었다면, 죽음은 사실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을 향해 가는 문에 불과함을 알게 될 것입니다.”
바둑이든 정치든 9단을 최고수로 친다. 죽음 문제와 관련해, 최고수 신앙을 성취해 보고 싶다.
위령성월이다. 테이야르 드 샤르댕(Pierre Teihard de Chardin, 1881~1955) 신부님의 기도,‘아름답게 늙어 갈 수 있는 은총을 청하며’를 바친다.
노년의 징표가 제 몸에 나타날 때,
제 마음이 그것 때문에 괴로울 때,
제 목숨을 빼앗을 병이 어디선가 쳐들어왔을 때,
제가 아프거나 늙어 간다는 사실을
갑자기 깨닫는 고통의 순간이 왔을 때,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마지막 순간에 제가 저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 갈 때, … 이 모든 어둠의 순간에, 오 하느님,
이 모든 것이 당신 안으로 저를 데려가기 위해서라는 것을,
제 존재의 본질들을 고통스럽게 갈라놓는 분이 당신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허락하소서.
- 제임스 마틴 신부의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 발견하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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