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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칼럼_죽음에 대하여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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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560회 작성일 21-11-03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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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칼럼- 죽음에 대하여Ⅰ

 

요즘 내 주변을 떠나지 않고 서성거리는 스토커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 요 녀석의 이름은 고통이다. 털어내려고 하면 할수록 더 악착같이 달라붙는다.

그 고통의 맨 앞줄에 육체적 고통이 있다. 승용차 문 닫다 손이 끼어 손톱 빠진 경험은 생각만 해도 머리카락이 곤두선다. 버스를 타기위해 뛰어갈 때, 발뒤꿈치 물집 주위가 화끈거리면 정말 고역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육체적 고통에는 그나마 찾아갈 병원이 있다. 정신적 고통이 찾아오면 혼자서 끙끙 앓아야 한다. 인간은 몸이 건강할 때도 아픈 마음 때문에 눈물 흘린다. 더 나아가 우리는 격렬한 분노를 감춘 가식적인 우정, 쉽게 허물어지는 사랑, 채우지 못한 욕심으로도 고통 받는다.

그런데 이 모든 고통들이 명함도 내밀지 못하는 가장 큰 고통이 있다. 죽음이 그것이다. 죽음을 떠올리는 것은 유쾌하지 않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 하는 것은 그 정체가 암흑 속에 가려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다.‘하늘이 이미 내안에 덕을 부여하였다.’(天生德於予, 논어 술이 23) 유한에서 무한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창조 때부터 이미 내안에 심어 주셨다. 은총이 아닐 수 없다. 죽음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은총 때문에 죽음을 극복할 수 있다.

 

어머니 뱃속의 태아는 인터넷 사용법을 모르지만, 참으로 오묘한 방법으로 어머니와 소통한다. 죽음에 대해 명확한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해답을 찾을 수는 없지만, 우리는 하느님과 오묘한 방법으로 소통하며 죽음의 의미 그 자체를 살 수 있다.


가톨릭대 박승찬 교수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 길을 묻다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육체의 죽음이 최종적인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 합니다. 영혼이 순례의 길을 계속해서 나아가고 있다면 육체의 죽음은 그 과도기에 일어난 한 사건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 1632~1677)는 우리가 2+2=5가 아니라 2+2=4라는 것에 대해 화를 내거나 슬퍼하지 않는 것처럼, 필연적인 죽음을 슬퍼하거나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저 주님. 제 얼이 다하여 갑니다. 주님, 당신께 피신합니다”(시편 143,7-9)라고 기도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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