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칼럼_기쁨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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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511회 작성일 21-09-27 16:35본문
기쁨의 역사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참 좋다”며 기뻐하셨다.(창세 1,31 참조)
그 기쁨이 인간에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웃는 인간에 대한 인류 최초 문자기록(창세 18,12;21,6)의 주인공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다. 그 아름다운 미소를 바라보았을 아브라함도 참 기쁨으로 충만한 인물이었다. 그의 외아들 이사악도 하느님으로부터 기쁜 소식을 듣는다. “너의 후손을 하늘의 별처럼 불어나게 하고, 네 후손에게 이 모든 땅을 주겠다.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너의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창세 26,4) 이 때가 기원전 2000년경 이다.
세월이 흘러 기원전 1250년경, 이집트에서 탈출에 성공해(파스카) 완전한 자유의 세계로 들어간 유대인들은 기쁨에 휩싸인다. 얼마나 기쁨이 컸을까. 유대인들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발 구르며 환호했다.(탈출 15,1-21 참조)
또 기원전 1000년경,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계약 궤를 옮겨 안치한 다윗 왕은 기쁜 나머지 덩실덩실 춤을 춘다. 이런 다윗의 모습에 대해 사무엘 하권은 “온 힘을 다하여 주님 앞에서 춤을 추었다”(2사무 6,14), 역대기 상권은 “껑충껑충 뛰며 춤추었다”(1역대 15,29)고 표현하고 있다.
이후 기원전 630년경 예레미야 예언자는 충만한 기쁨 안에서 새 계약을 선포했다.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때에 나는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과 새 계약을 맺겠다.”(예레 31,31)
이후에도 기쁨의 역사 수레바퀴는 쉬지 않고 계속 돌아간다.
마리아는 천사로부터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라는 소리를 들었다. 들판의 목자들도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루카 2,10)는 소식을 들었다. 그렇게 기쁜 소식으로 세상에 온 그리스도는 스스로 기쁨 한 가운데서 머물렀다. “나는 너희 때문에 기쁘다.”(요한 11,15)
죄가 많아 우울하다고? 세상 살기가 힘들다고? 그리스도는 기쁨에 대한 이러한 의문 부호들을 말끔히 걷어냈다.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다.”(로마 5,20)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요한 7,37) “청하여라. 받을 것이다. 그리하여 너희 기쁨이 충만해질 것이다.”(요한 16,24) 예수는 죽음이 임박한 그 고통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서 조차, 혼인잔치의 기쁨에 대해 말했다.(마태 22,1-10)
수천 년을 이어온 기쁨의 역사는 이제 전혀 다른 물줄기를 타기 시작한다.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우리를 바라보는 당신의 눈은 참으로 인자하시다.(마르 10,21 참조) 그 평화로운 시선이 개인주의적 물질주의적 감각적 기쁨이 아닌, 선포하는 참 기쁨의 정중앙으로 초대하고 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필리 4,4)
성체 앞에 무릎 꿇거나, 그분의 현존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기쁨인가. 그 ‘참 기쁨’을 세상에 전하는 소명에 동참해 달라고 지금 프란치스코 교황이 호소하고 있다.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는 기쁨으로 가득하고 언제나 기뻐할 줄 압니다.”(「복음의 기쁨」 24항)
기쁨의 역사 수레바퀴는 계속 돌아야 한다. 이를 위해선 동력이 필요하다. 기쁨의 기도가 그것이다. 기쁨의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성모님 향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기도에 기쁨으로 함께한다.
“살아있는 기쁜 소식의 어머니, 작은 이들을 위한 기쁨의 샘이시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알렐루야!”(「복음의 기쁨」 288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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